제 인생의 이야기: 전설적인 전쟁의 아버지
이것이 제가 영적 및 심리적 전쟁에서 세계 최고가 된 방법입니다...
저는 1986년 12월 26일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사탕 가게를 운영하셨고, 아버지는 아이비리그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장로교 교단에서 목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계셨죠. 세 살, 언니가 네 살때 저와 가족 모두 뉴욕 퀸즈로 이사했어요당시 저희 가족은 매우 가난했는데, 아버지가 교회를 개척한 초기 단계였기 때문이죠. 부모님은 지나치게 엄격하셨고 저는 목사님의 아들이자 기독교 신자로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항상 받았어요. 헤어스타일부터 장신구, 옷차림, 세속 음악 감상 등 다른 문제아들이 하는 짓을 할 수 없었죠. 특히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협조하지 않아서 교회에 문제를 일으켜 아버지에게 여러 번 매를 맞았습니다. 베이사이드에 있는 M.S. 158이라는 중학교에 다닐 때, 마지막 학년이 시작되기 전쯤에 부모님이 제가 잘못된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기를 바라셔서 그레이트넥 노스라는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어요. 이 시기삼합회라는 중국계 마피아와 함께 한국계 미국인, 중국계 미국인 공 조직원들이 많이 있었어요. 총격전이 많이 일어났고 코카인과 엑스터시 등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이 많았죠. 저는 그레이트넥 노스가 정말 싫었어요. 괴짜들이 가득한 학생들로 가득했고, 그 당시에는 너무 미성숙해서 제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부모님은 베이사이드와 플러싱과 마찬가지로 그레이트넥 사우스에도 법을 어기는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저를 보내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두어 달 다니고 나서 저는 어머니께 베이사이드 고등학교에 보내달라고 간청하면서 보내주면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약속했어요. 하지만 제가 정말 원했던 것은 말썽꾸러기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국계 미국인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 친구들이 제가 가진 유일한 친구였어요. 어머니는 제 소원을 들어주기로 결심하시고 베이사이드 고등학교로 전학시켜 주셨어요. 전학 온 지 3개월도 안 됐는데 저는 학교를 빠지고 엉뚱한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었어요. 담배를 피우고 다른 학생들과 여러 차례 길거리 싸움을 벌인 저와 함께 부모님에게도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제 주변에는 어린 나이부터 마리화나를 많이 피우고 마약을 판매하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학교 보안 요원, 특히 경찰과 문제를 겪었습니다. 당시 제가 2학년이었는데 부모님은 제가 이런 상태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부모님은 저를 기독교 기숙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하셨어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곳이라고만 들었을 뿐, 저는 그곳을 자유라고 오해했습니다. 그 나이에 세상에 대해 잘 몰랐던 저는 나중에 이곳에 대해 매우 이상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가출을 결심했습니다. 당시 플러싱에는 한국 축제가 열리고 있었고, 한국에서 많은 가수들이 뉴욕에 와서 공연을 하는 등 한국인과 한국계 미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어요. 한국 올림픽이 열렸고 말 그대로 베이사이드와 플러싱 주민 전체가 플러싱 메도우 공원에 모인 것 같았어요. 3일 동안 집을 떠나서 담배도 마음껏 피우고 술도 마음껏 마실 수 있었어요. 저는 돈이 없어서 친구들과 식당에서 밥을 먹고 계산도 하지 않고 도망쳤어요. 플러싱 메도우 파크에는 플라잉 드래곤과 고스트 섀도우라는 중국 갱단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과 적대적이었고 제가 아는 몇몇 친구들은 엑스터시를 과다복용해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어요. 또한 베이사이드에서 제 처남은 마약에 취한 채로 많은 문제아들이 모여서 열광하는 디제이 가게를 운영했습니다. 마지막 날 밤 친구 집에서 소주 5~6병 정도를 마시고 자고 있었는데, 아침에 어머니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저를 어떻게 된 일인지 발견하셨어요. 어머니는 기숙학교로 가든지 아니면 아버지가 호위병을 보내서 저를 끌고 가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순순히 가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 캠퍼스는 미주리주 스톡턴에 있었고, 공항이 있는 캔자스시티에 도착한 후 저와 어머니는 근처 모텔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날 밤 저는 이 모든 상황을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프로그램에 대해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설레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했습니다. 학교 캠퍼스에 도착했을 때 입구 길에 "아가페 기숙학교"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농장 같은 환경과 많은 동물들이 있는 시골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저는 이곳을 매우 과소평가했습니다. 정문으로 들어서서 어머니가 원장 사모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덩치 큰 남자 두 명이 다가와서 다른 방으로 안내를 받았습니다. 저와 어머니는 울면서 현관문을 나설 때 서로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습니다. 직원들은 제가 가지고 있던 뉴포트 담배 한 갑을 압수하고 주황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저에게 줬어요. 그것은 부트캠프에 있는 학생들의 컬러 코드 중 하나였습니다. 기독교 기숙학교가 그렇게 끔찍한 수용소 환경일 줄은 전혀 몰랐어요. 머리 스타일은 대머리를 깎거나 옆으로 가르마를 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제 머리는 이미 삭발한 상태였기 때문에 바꿀 필요가 없었습니다. 카페테리아에 들어서자 저와 같은 주황색 셔츠나 노란색, 버건디색 셔츠를 입은 2백여 명의 학생들이 보였습니다. 노란색 셔츠는 부트캠프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기 위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버건디색 셔츠 학생도 학교에 다녔지만 버디 상태인 경우 주황색과 노란색 셔츠에 대한 권한이 있었습니다. 버디 상태 규칙은 신입생과 하위권 학생들이 프로그램의 규칙을 배우고 따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모드였습니다. 하위 랭커들은 말 그대로 3피트 이상 떨어져 있지 않아야 하고, 버건디색 셔츠 앞에서 24시간 내내 뒤돌아봐야 했습니다. 첫 날은 제가 살아온 15년 중 가장 힘든 날이었어요. 다른 6~7명의 부트캠프 대원들과 함께 캠퍼스 전체에 쌓인 눈을 모두 삽으로 치워야 했고, 그 외에도 엄청나게 강도 높은 체력 훈련을 해야 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다음날 아침에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였어요. 팔굽혀펴기, 레그 리프트, 스쿼트, 크런치, 그리고 콴자헛에서 앞뒤로 전력 질주하는 동작을 300회 정도 반복해야 했죠. 저는 선천적으로나 유전적으로 강했고 그 나이에 팔씨름에서 진 적이 없었지만 여전히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때 저는 스스로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버지는 어떻게 나를 그런 곳에 보낼 수 있을까?"라고 물었습니다. ' 아무리 자책하고 아버지를 원망하며 기분을 나아지게 하려고 해도 상황은 더 악화될 뿐이었습니다. 2001년 12월이었고 저는 이곳에서 생지옥을 겪으며 16번째 생일을 보냈습니다. 집에 있는 친구들이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모습만 보였고, 200명의 다른 학생들과 함께 있어도 저는 외로움을 많이 느꼈어요. 우리가 해야 했던 육체적 노동은 완전히 수용소 환경이었으며, 프로그램의 모토는 자신을 무너뜨리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일이 고된 노동이었지만 음식은 매우 맛있었고 기숙사 방과 침대는 따뜻하고 편안했습니다. 저는 3개월 동안 어머니가 집에 데려다주러 오길 바라며 창문과 현관문을 몰래 쳐다보곤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3개월마다 면회가 주어졌고, 입소 3개월째부터는 가족과의 전화 수발신과 편지 주고받기만 허용되었습니다. 우리가 편지를 읽거나 보내기 전에 직원들은 모든 편지를 읽었습니다. 3개월 후 부트캠프를 졸업했을 때 드디어 어머니의 첫 면회를 받았습니다. 어머니를 뵈었을 때 눈을 믿을 수 없어서 달려가서 가장 큰 포옹을 해드렸고, 집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곳에는 한국 음식이 없어서 어머니가 컵라면과 한국식 바비큐를 가져왔어요. 저는 어머니와 함께 있는 동안 집에 데려다 달라고 조르기도 했지만 계획과 예상대로 되지 않았어요. 우리는 함께 당구도 치고 과일 공놀이도 하면서 전에 없던 웃음을 터뜨렸어요. 첫 방문이라 캠퍼스 밖으로 나갈 수 없었어요. 그래도 우리는 함께 좋은 시간을 보냈어요. 핫초코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특권이 있을 때만 면회와 같은 특별한 경우에만 허용되었습니다. 3일간의 면회였지만 어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 중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셋째 날이자 마지막 날에는 제가 처한 모든 상황에 대해 깊이 생각했습니다. 우리 모두 수요일에는 채플에, 일요일에는 교회에 참석해야 했어요. 이제 부트캠프를 졸업했으니 학교에 가서 주황색 셔츠 다음으로 높은 계급인 노란색 셔츠를 입을 수 있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학교는 선생님의 강의를 듣는 대신 자기 페이스대로 공부한다는 점에서 고향의 공립학교와는 달랐어요. 큰 허리케인이 닥쳐서 전교생이 고된 노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학교에 오래 다닐 기회가 없었습니다. 캠퍼스가 너무 커서 허리케인이 날려버린 나무와 돌, 무거운 건물 부품을 모두 들고 몇 마일을 운반해야 했어요. 지쳐서 땅에 떨어뜨리면 곧바로 다시 들어올려서 다시 떨어뜨리고 다시 운동을 하는 등 많은 체력 훈련을 해야 했죠. 연필로 엄마를 찔러서 이 프로그램에 온 13세 학생이 있었는데, 이때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말을 듣지 않아서 그냥 바닥에 쓰러졌고, 미친 사람처럼 욕을 하기 시작하자 직원들이 제지하고 다른 방으로 데려갔어요. 직원 중에는 해병대 출신, 특수부대 출신, 경비원 출신, 헤비급 복서 및 역도 선수 출신, 미주리주 보안관 출신 등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담임 목사님도 복싱 헤비급 챔피언 출신이었습니다. 학생들이 기숙학교에서 가출을 시도한 적이 여러 번 있었고, 학교 역사상 집으로 돌아간 학생은 단 한 명뿐이었지만 에스코터를 통해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소년원에서는 재산을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 번 더 기회를 주기 위해 법에 의해 이곳으로 오라는 명령이 내려져 수많은 학생들이 이곳으로 보내졌습니다. 우리 세대는 규칙이 너무 엄격하고 가혹해서 전체 프로그램이 캘리포니아주 스톡턴에서 쫓겨나 미주리주로 옮겨졌을 정도로 두 번째로 힘든 시기였어요. 육체 노동과 규율 훈련이 너무 잔인해서 학생들이 너무 강해져서 감당하기 힘들어졌죠. 그래서 제 시절에는 여가 시간에 무거운 역기를 들어 몸을 단련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어요. 주 근육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막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단기간의 단련이나 이런저런 운동으로 무거운 물건을 더 많이 들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우리 몸은 나이보다 훨씬 더 빨리 강해지는데, 프로그램 담당자와 재단 대표님도 이 사실을 알고 계셨어요. 대부분의 학생들은 주로 마약과 갱 관련 문제로 이곳에 보내졌고, 나머지는 부모에 대한 반항 때문에 이곳에 보내졌습니다. 저는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온 사촌이 있었고, 나중에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온 또 다른 사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아는 핏줄이라는 이유로 자가격리 조치를 받았어요. 당시 남가주에는 50명이 넘는 한인들이 있었고, 뉴욕 퀸즈에는 3명의 한인만 있었어요.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6개월이 될 때까지 그날이 오지 않았어요. 저는 어머니께 이 프로그램이 생각보다 너무 무서운 곳이라고 계속 말씀드렸어요. 학생의 면회 가족들이 면회를 왔을 때 그들이 보는 것은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헤어스타일을 하고 행복하게 웃는 착한 학생처럼 보이는 우리 학생들뿐이었어요. 그리고 우리가 고된 노동이나 힘든 체력 단련을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집에 사진을 보낼 때도 화나거나 슬픈 표정을 지으면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계약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를 집으로 데려갈 수도 있기 때문에 웃어야만 했습니다. 두 번째 방문 날 어머니는 저를 풀어주셨고 저는 공립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저는 다시 학교를 그만두고 엄청난 양의 담배를 피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낸 지 3일 만에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게 되셨고, 저를 아가페 기숙학교로 다시 보내기로 결정하셨어요. 다시 한 번 가출할까도 생각했지만, 두 번째 가출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프로그램이 제가 가고 싶지 않은 마지막 장소였음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여지없이 협력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프로그램에 다시 들어갔을 때 저는 다시 부트캠프로 보내졌습니다. 저는 이것이 제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했고 기숙사 방에서 잠을 자면서 악몽을 수없이 꾸기도 했습니다. 전교생 전체가 교직원들에게 몰려가서 프로그램을 완전히 탈출하는 상상을 하곤 했어요. 수적으로 크게 열세인 상황에서도 스태프들의 힘이 그렇게 강할 줄은 몰랐어요. 프로그램 후반부에 저와 고향이 같은 학생이 들어왔는데, 같이 가출할 수 있다고 판단되어 우리도 외출 금지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프로그램에 함께 있는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가끔씩 몰래 대화를 나누었고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그는 '모밍 파이'라는 갱단의 6대손으로 일명 'MMP'라고 불렸죠. 중국계 미국인 갱단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한국계 미국인과 합쳐진 조직이었죠. 특히 같은 고향 출신이라 함께 도망갈 계획을 세우곤 했어요. 동물이 많은 숲속을 통과해야 했고, 경찰이 합법적으로 수색을 하고 있었으며 현금이나 신용카드도 없었기 때문에 통과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심지어 모든 건물과 기숙사의 문은 경비가 잘 되어 있었고 학교 직원들은 말 그대로 항상 저희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캠퍼스 전체가 전기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모든 교직원들도 캠퍼스 안에서 생활했습니다. 어느 날 저와 그 친구는 서로 도망가서 탈출하라는 쪽지를 주고받다가 둘 다 붙잡혀 신발을 빼앗기고 다시 신병 훈련소로 보내졌어요. 신발 빼앗기는 규칙은 도망가려고 하거나 교관들에게 우리가 도망가려고 할 것 같은 인상을 주는 학생들에 대한 모드였습니다. 일반 운동화나 드레스화 대신 발보다 두 배나 크고 신발의 혀가 잘린 너덜너덜한 운동화를 신어야 했습니다. 마치 걸음을 지탱해줄 윗부분이 없는 거대한 슬리퍼 위를 걷는 것과 같았습니다. 또한 말하지 못하게 하는 손목 밴드를 착용하고 2주 동안 계속 벽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듣고 몸짓과 함께 수화도 함께 들으며 우리를 감시하는 직원이 없는 한 학생들 중 누구도 서로 대화할 수 없었습니다. 벽을 마주하면서 프로그램에서뿐만 아니라 집에 돌아와서도 제가 잘못한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너무 많은 문제를 일으켜서 어머니가 소파에서 우시는 모습을 상상하며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모든 학생들은 매일 아침 밥을 먹기 전에 성경을 읽어야 했고, 매주 수요일에는 채플에 참석하고 주일에는 교회에 가야 했습니다. 어느 날 성경을 보다가 왠지 모르게 시편과 잠언의 장에 이르렀어요. 그러던 중 지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는 무언가가 제 관심과 주의를 끌었습니다. 제 한글 이름의 첫 글자가 지혜를 뜻하는데, 부모님이 제가 어른이 되면 크게 쓰시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하면서 지어주신 이름이었어요. 지혜가 정확히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저는 분명히 이 높은 힘을 얻고 싶었습니다. 저는 세 살 때부터 하나님을 믿었지만 아가페 기숙학교에 오기 전까지는 세례를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구원에 관한 설교를 듣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공식적으로 영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담배가 너무 피우고 싶었지만 담배를 빨아들이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 지 6개월째 되던 날, 어머니는 저를 훨씬 더 느슨하고 힘든 노동이 없는 다른 프로그램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습니다. 뉴욕 북부에 있는 프리덤 빌리지라는 곳이었어요. 이 프로그램에서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유일한 점은 문제 청소년을 위한 기독교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담배도 피울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앤드류 박이라는 친구를 만났는데, 그는 저와 같은 고향 출신의 한국계 미국인이었고, MMP라는 아시안 공의 멤버였어요. 그는 소년원에서 두 번째 기회를 주기 위해 이곳으로 보내졌어요. 그는 이곳에 온 지 몇 주 만에 프로그램을 그만뒀는데, 그 일이 저를 더욱 집에 가고 싶게 만들었죠. 프로그램이 너무 느슨해서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머물러야 하는 것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냥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이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나셨고, 제가 돌아가면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는 저를 어떻게 다시 아가페 기숙사로 보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계셨어요. 며칠 동안 집에 머물면서 부모님은 한 가지 계획을 세우셨는데, 아가페 기숙학교에 친한 사촌이 있는데 저를 그곳에 맡긴다는 사실을 모른 채 어머니와 함께 휴일에 사촌을 방문하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기꺼이 그곳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정문에 들어서자 덩치 큰 직원 다섯 명이 저에게 다가왔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계셨어요. 그때 제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깨달았고, 제가 다시 한 번 직면하게 될 일이 믿기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부트캠프에 다시 보내졌고, 계속 문제를 일으켜서 부트캠프에 떨어지고 그곳에서 도망쳐서 벗어나려고 했기 때문에 면회도 하지 못한 채 10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공부할 기회도 없었어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지루한 몇 개월의 고난의 시간이었고, 16년 동안 살아오면서 그때만큼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4개월이 더 남았을 무렵 저는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주방에서 무급으로 일하게 되었고, 학교 역사상 세 번째로 돌아온 학생은 제가 유일했습니다. 그래서 직원들은 항상 저를 더욱 세심하게 관찰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북한의 수용소에 훨씬 더 가까웠기 때문에 감옥보다 더 관리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침내 만 18세가 될 무렵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보석금을 내주셨고, 어차피 제때 졸업장을 받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프로그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부모님이 보석금을 내거나 졸업하거나 법적으로 만 18세가 되는 세 가지뿐이었어요. 18세가 되면 직원들의 도움 없이 합법적으로 정문으로 바로 나갈 수 있었어요. 모든 끔찍한 고난이 영원히 제 어깨에서 벗어난 바로 이 순간 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공항에 데려다 주시는 동안 저는 너무 익숙해져서 직원들이 저를 쫓아오는 건 아닌지 차 뒤쪽을 스무 번 넘게 뒤돌아봤어요. 따뜻한 코코아나 아이스 커피를 마시는 것 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 그리고 당연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이 저에게는 매우 감사한 일이 되었습니다. 저에게 아가페 기숙학교는 제 현실이었고,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겪은 충격적인 사건들은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누구도 진정으로 이해하고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여정의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프로그램의 엄격한 규정에 얽매이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던 저는 며칠 동안 어머니께 목욕탕을 써도 되는지 계속 물어보곤 했는데, 어머니는 왜 자꾸 화장실만 쓰냐고 웃으시며 물어보시곤 하셨어요. 그제서야 어머니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면서 제가 없는 곳에 항상 제 방에 들어와 제 옷을 만지시고, 아들이 외롭고 끔찍한 곳에 있는 줄도 모르고 밥도 제대로 못 드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18세가 되기 몇 달 전이었고, 아가페 기숙학교를 졸업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학 과정을 공부할 수 있는 러닝 스타트 프로그램이 있는 기술학교에 다녔는데, 그 학점으로 검정고시를 치르지 않고도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어요. 이곳에 다니기 전에는 다른 친구들이 대학에 진학하거나 괜찮은 직장을 구할 때 혼자서 다른 주를 여행하며 검정고시나 고등학교 졸업장 없이도 살아남을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먼저 직업을 배우면서 동시에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는 직업 봉사단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그곳은 오리건주에 있었는데, 제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거의 매일 비가 내렸고 하루 종일 비가 쏟아졌습니다.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같은 목적을 위해 이곳에 모였는데, 나이 제한이 30세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30세가 매우 늙고 존경받는 나이인 것처럼 보였어요. 이곳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 있었지만 저는 정말 공부하고 싶지 않았어요. 약 2년 동안 고등학교 졸업장이나 검정고시 없이 살아남을 방법을 찾기 위해 이 주 저 주 돌아다녔어요. 취업 봉사단 프로그램을 마치고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워싱턴 주 시애틀로 가서 노숙자 쉼터 위에 있는 작은 원룸을 빌렸지만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향 친구의 초대를 받아 버지니아에 갔고, 저와 그 친구, 그리고 다른 친구 한 명이 조니워커 술을 많이 마시고 담배를 엄청나게 피웠어요. 그들은 마리화나 대마초를 많이 피웠지만 저는 냄새가 끔찍하고 초침이 졸리고 게을러지기만 해서 피우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제가 인생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걱정하셨습니다 . 그래서 저는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뉴욕으로 돌아갔어요. 맨해튼 펜 스테이션에 있는 기술직업학교로 다시 돌아왔어요. 그때 27살의 중국인 여성을 만났는데 당시 저는 19살이었어요. 그녀는 저와 같은 반이었고 둘 다 퀸즈 플러싱에 살았기 때문에 7호선을 함께 탔어요. 결국 공식적으로 사귀게 되었지만 어머니가 보기에 그녀는 너무 수상했지만, 저는 그녀와 제가 처한 상황에 대해 너무 눈이 멀어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녀가 중국에 남편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고, 제가 미국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가짜 결혼 증명서를 위조하여 영주권을 받으려고 저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또한 그녀가 삼합회라는 중국 마피아 조직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도 몰랐어요. TCI 대학에서 중국인 여자를 만나기 전 저는 한국계 미국인과 중국계 미국인이 모인 길거리 갱단 '모밍파이'에 소속된 큰 문제아였어요. 모밍파는 중국어로 노놈 갱, 한국말로 무명파라는 뜻입니다. mmp 갱단은 플러싱에서 가장 큰 두 개의 갱단을 적으로 삼고 있었는데, 그들은 날으는 용과 유령 그림자라고 불렀습니다. 이 세 갱단은 사창가, 도박장, 룸살롱, 나이트클럽, 술집 등을 운영했기 때문에 서로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여러 차례 싸움을 벌였습니다. 저는 엠엠피에 입사하기 전부터 유령 그림자와 친구 사이였는데, 어느 날 오해가 생겼어요. 공원 벤치에 고스트 섀도우 멤버들과 함께 앉아 있었는데, 그들이 농담 삼아 저에게 자기네 갱단에 들어와서 mmp에서 나가자고 했어요. 저는 거절했고 그들은 이해했지만, 한 명의 멤버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다일로라고 알려진 mmp 갱단 리더에게 제가 mmp를 배신하고 고스트 섀도우에 합류했다고 말했어요. 그는 공원 벤치에서 저를 발견하고 제 멱살을 잡았습니다. 그는 "왜 그랬어? '라고 물었고 저는 제가 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는 믿지 않았어요. 그래서 갱단 두목은 제 뒤통수를 때리고 죽이려고 했는데 다행히 백인 할머니 한 분이 갱단 두목에게 "미안하다고 말해!"라고 소리쳤어요.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췄어요. 저도 모르게 할머니를 보내 기적적으로 저를 구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결국 그들은 저에게 맞는 친구가 아니었거든요. 하나님은 이런 삶과 생활 방식에서 저를 구해 주셨어요. 또한 나이트 클럽에서 만난 또 다른 친구는 중국 마피아 삼합회와 연계된 마약 중독자였는데, 그 친구 역시 마약 중독자였어요. 저는 엑스터시와 코카인이 그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았고, 신이 저를 그 세계에서 건져내지 않았다면 오늘날 숨을 쉬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어느 휴일, 저는 그 소녀의 집을 깜짝 방문했다가 남편과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고, 그녀가 실제로 중국에서 사기꾼이자 범죄 조직의 일원이었던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충격적인 상황이었고, 그때 어머니의 말이 정말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머니가 중국 마피아를 보내 저를 강제로 결혼시키고 안 되면 죽일까 봐 걱정되고 무서웠기 때문에 미 해병대에 입대해 탈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갈 곳이 아니며 저에게 맞지 않는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저는 고집이 세고 불순종적이어서 말을 듣지 않았어요. 저는 이것이 제 인생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저는 검정고시도 없었고 심한 ADHD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모집 담당자는 보너스를 받기 위해 그것을 흔들어댔어요. 군대, 특히 해병대의 끔찍한 스트레스 환경 때문에 ADHD를 앓고 있는 사람은 정신 장애를 겪을 확률이 높습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파리 아일랜드에 있는 미 해병대 신병 훈련소에서 노란 발자국을 밟았을 때 저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느꼈고, 악마 훈련 교관들이 신병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후회가 많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가장 어려운 부대인 3102 중대 3대대 킬링 머신 소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신병 모집 담당자가 저를 그토록 미워했던 이유가 그 당시에는 외모만 있고 지식이나 지혜, 인간관계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소대원들 중 체격이 가장 좋았고, 힘이 가장 세지는 않았지만 아가페에서 생지옥을 겪었기 때문에 살아남는 방법을 알고 있었어요. 당시 19살이었던 제가 해병대에 입대한 이유는 단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중국 마피아에게 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내 인생에서 무언가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죠. 신병 훈련소에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체력 단련이었는데, 운동에 대한 내성이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웠기 때문입니다. 부트캠프를 졸업하기 위해서는 3마일을 조깅해야 했는데, 저는 꼴찌로 겨우 통과했습니다. 힘들 때마다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계속 달렸어요. 참가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낮은 곳을 알지 못하면 빠져나오기가 매우 어려운 곳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훈련 중 가장 편안했던 때는 훈련 교관들이 물러나서 제가 조준하고 있는 표적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소총 사격 때였습니다. 다른 때는 교회에 있을 때나 내무반에서 편지를 받을 때였습니다. 훈련 교관들이 신병들에게 지옥의 비를 퍼붓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일요일에 교회에 가면 갑자기 모든 것이 즐겁고 사랑스럽게 변하는 교회 환경이 매우 이상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버지와 교회, 그리고 나머지 가족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해병대 훈련소는 사실 미리 완벽하게 준비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장애물 코스, 체력 훈련, 가스실, 장거리 하이킹 등 많은 훈련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저는 무너졌지만 다른 해병대원들처럼 강인한 정신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아가페와 해병대는 제가 정신적, 심리적 전쟁에서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한 최고의 훈련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에게 가장 어려웠던 훈련은 격렬한 심폐지구력을 필수로 요구하는 훈련이었습니다. 해병대원들과 비교했을 때 제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깨달았고, 체력적으로도 매우 약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신병 훈련소를 졸업하고 졸업식에 가족들이 찾아왔을 때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롭고 반가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며칠 동안 집에 있다가 해병대 센터인 MTC 학교에 가서 본대에 갈 준비를 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저는 일본 오키나와에 배치되었습니다. 오키나와는 아름다운 섬이었고 소대원들과 달리다가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좋았어요. 원래 소대는 제가 도착하기 전날 이라크로 떠났고, 대신 마라톤 선수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죠. 저는 군에서 의병 제대를 받았고 모든 서류 작업이 마무리된 후 군에서 제대했습니다. 일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페리를 타고 곧장 한국으로 향했습니다. 한국에 간 건 중학교 때 처음이었는데, 그때는 두 번째였어요. 그때도 한국에 아는 사람이 없었고 단돈 1,500달러만 가지고 갔어요. 당시 저는 일자리가 절실히 필요했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영어를 가르치거나 번역하는 것뿐이었어요. 그래서 바로 현지 학원에 취직했고, 나중에는 초등학생부터 중학생까지 개인 과외도 했어요.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어서 한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인 강남에서 수출입 회사의 통역사로 일하게 되었어요. 그곳에서 상사를 만났는데, 그는 한국의 아이비리그 출신이었어요. 돈과 숙소가 급하게 필요했던 저를 받아주셨어요. 당분간은 사무실에서 자게 해주셨고, 나중에는 사장님 집으로 가서 사장님 가족을 소개해 주셨죠. 제가 위조한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선한 마음으로 저를 받아주셨다고 지금도 믿습니다. 항상 아버지께 진실을 밝히고 깊이 사과드리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어요. 한국에서의 생활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지만, 부모님이 많이 아프셔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오 씨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TCI 대학에 다시 다니면서 검정고시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기 위해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라는 IVY 리그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공부하던 중 2년 정도는 낵 칼리지라는 성경 대학에 다녔어요. 하지만 저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았는데, 바로 프리랜서 글쓰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20대 초반에 스파에서 샴푸 보조로 일하게 되었죠. 글쓰기와 샴푸 보조직은 제가 포기하지 않은 유일한 두 가지 직업이었어요. 20대 초반까지는 심리전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태어날 때부터 제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기독교 관련 책만 쓰려고 했는데, 제 안에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깨달은 후 영적 전쟁과 심리전에 관한 책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제가 두 전쟁에서 세계 최고라는 것을 저만 알고 있었습니다. 21살 때부터 현재 37살까지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습니다. 학교, 교회, 직장, 사회 어디에서든 저는 모두를 웃음거리로 만들었습니다. 하루 8~9시간씩 카페나 스타벅스 커피숍에서 장시간 독학으로 자격증을 따고, 그 시간 내내 글을 쓰면서 부모님도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열심히 성실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제가 최고가 되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죠. 어렸을 때부터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저를 크게 쓰실 거라고 말씀하셨고, 아이비리그에 진학한 언니는 아이비리그에 진학한 저에게 항상 더 큰일을 하실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항상 그분들이 모두 좋은 마음에서 저를 칭찬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분들의 진짜 뜻을 알았습니다. 오래 전에 아이비리그에 다니셨던 아버지 역시 어머니에게 제가 심리전의 천재라고 말씀하셨고, 교인들에게도 제가 타고난 천부적 기독교인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심리전에서는 모든 것을 얻거나 잃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에 존경을 받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저를 존경한다고 말한 남성은 세 명뿐이었지만, 여러 명의 여성이 저를 받침대에 올려놓는 것이 훨씬 더 쉬웠습니다. 하버드, 컬럼비아, 프린스턴 대학교의 정신과 의사와 심리학자들도 제가 공부만 했다면 아이비리그 역사상 최고의 학생이 되었을 거라고 말했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계 최고는 고졸 출신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아가페학교와 해병대는 저에게 마인드 파워를 키우고, 타고난 재능을 활용하는 법을 배우게 해준 하나님의 훈련장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폭격에도 쓰러지거나 감정적으로 놀라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를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곤 했어요. 저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상대해왔고, 항상 여자들을 지배하고 쟁취하지만 세상을 돕기 위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것은 제가 만든 문장 반복 전략으로 시작했고, 이를 마스터한 후에는 두 전쟁의 모든 지식, 지혜, 기술을 더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기독교, 심리학, 철학, 관계, 삶의 방식이라는 다섯 가지 무한한 핵심 주제에서 파생됩니다. 저는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선물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데 제 삶을 바칠 것을 서약합니다. 저의 목표는 모든 사람을 두 가지 전쟁에서 저보다 더 뛰어난 천재로 만들어 이 무한한 파도와 끝없는 세상의 물결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세계는 심리전이고, 그다음은 강화 또는 진보된 마음, 그리고 마지막은 영적 전쟁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영원히 뒤집어서 바꿀 것입니다.